산업부, 日 르네사스와 접촉 나서
호환성 문제로 타사 교체 쉽지않아
긴밀히 연결된 산업 관계 무시한채
특정국 배제 땐 돌발 변수에 취약
정부가 주요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등 기존 공급망을 흔드는 돌발 변수에 완벽히 대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29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인 일본 르네사스사에 장관 명의의 공문을 지난 20일께 전달했다.
산업부는 공문에서 제조 물량을 국내 업체에 우선 공급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가 불거진 후 정부가 일본 업체에 물량 지원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자동차의 개별 기능을 제어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며 대당 평균 200개가 들어간다. 이 중 한두 개라도 빠지면 자동차를 완성할 수 없다.
이달부터 차량용 반도체 수급 부족 사태가 심화하면서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 업체는 공장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고 있다.
정부가 수출 규제 이후 거리를 둬왔던 일본에까지 협조를 구한 것은 국내 완성차 업체가 차량용 반도체를 조달하는 게 한계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차량용 반도체난이 불거진 뒤 다급히 국내 생산 거점을 늘리려 하지만 제품의 수익성이 낮아 생산에 나설 기업을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수 년 뒤 공정을 갖춘다한들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미세 공정의 우수성보다 신뢰성과 경험이 중요한 공정의 특성을 감안할 때 차량용 반도체 ‘보릿고개’를 조기에 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정부는 해외로 눈을 돌려 물량을 끌어모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세계 3대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인 NXP에 공급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위탁 생산을 도맡고 있는 TSMC의 증산을 위해 대만 정부와도 접촉면을 넓혀가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5월과 6월이 이번 반도체 수급난의 최대 고비가 될 것 같다”면서 “해외 여러 업체와 논의를 하고 있지만 전 세계가 수급난을 겪고 있어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고 말했다.
이번에 정부가 일본 르네사스에 SOS를 친 것은 기존에 사용하던 차량용 반도체를 타사 제품으로 단순 교체하기 쉽지 않다는 완성차 업계의 어려움 때문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다른 부품과 결합된 모듈 형태로 완성차 업체에 납품되는데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반도체가 바뀌면 다른 부품과의 호환성을 다시 검증해야 한다.
차량용 반도체와 다른 부품과의 호환성이 운전자의 안전과 직결되는 만큼 타사 제품을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완성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간 안 써본 제품을 사용하다가 문제를 내느니 출고를 미루더라도 썼던 제품을 구하는 게 낫다”며 “르네사스 제품을 썼던 업체가 당장 급하다고 NXP 제품을 쓰기는 어렵다”고 했다. ‘극일(克日)’을 내걸고 소재·부품·장비 자립에 속도를 붙이던 정부가 일본의 문을 두드린 배경이다.
다만 우리 정부의 요청에도 일본 기업이 우리 기업에 물량을 우선 공급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완성차 업체가 물량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 간 감정의 골마저 깊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현대차·기아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 업체의 생산 차질 사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사태를 지켜본 전문가들은 공급망 강화 전략이 제고돼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았다. 긴밀하게 연결된 산업 관계를 무시한 채 특정국을 배제하고 공급망을 설계하는 것은 이번처럼 돌발적 변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책 연구 기관의 한 관계자는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업체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라면서도 “국가 간 관계가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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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