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날아온 '산더미 안내문'… 빚 203조 한전의 한심한 돈낭비

충전기 운영사에 같은 내용 수천장

▲ 충전기 한 대당 1장씩… 한전발 '우편물 폭탄' - 최근 한 전기차 충전 업체 사무실로 한꺼번에 배송된 한국전력의 전기 요금 관련 우편물들. 이 업체 관계자는 "같은 내용의 우편물이 적어도 수천 장 이상 배달됐다"며 "적자에 시달려 전기 요금을 인상한다는 한전이 한 업체에만 안내 우편물을 이렇게 많이 보내는 게 맞는 일이냐"고 했다. /독자 제공
국내에서 전기차 충전기 4만여 기를 운영하는 A사는 최근 한국전력으로부터 ‘안내문 폭탄’을 받았다. 내년 2월부터 요금 부과 방식이 변경된다는 내용의 안내문 6000여 장이 한꺼번에 회사로 날아온 것이다. 봉투마다 든 한 장짜리 안내문은 모두 같은 내용이었고, 양면 컬러 인쇄가 돼 있어 이면지로도 쓸 수 없었다. 수백 장씩 끈으로 묶여 배달된 안내문들은 대부분 뜯어지지도 못한 채 모조리 종량제 봉투로 향했다.

◇재무 위기 한전, 업무 효율은 뒷전

역대 최악의 재무 위기에 처한 한전을 두고 여전히 업무 효율은 뒷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전은 지난 정부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보급에 총대를 메면서 태양광 업자에게 돈을 퍼주고, 한전공대 설립에 앞장서다 천문학적인 적자를 안았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된 적자만 43조원에 이르고, 부채는 203조원에 육박한다. 올해 상반기 이자 비용으로만 2조3000억원 가까이 썼다.

요금 인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뼈를 깎는 자구 노력에 대한 요구도 커졌지만, 자산 매각 등 구조 조정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업무 처리 방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2년 자구안에서 매각하겠다고 밝혔던 47개 국내외 자산 가운데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완료된 건은 21건뿐이고, 규정을 내세우는 업무 방식은 효율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 전기차 충전기 업계에서 논란이 된 ‘안내문 폭탄’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전은 내년부터 바뀌는 충전기 요금 부과 방식을 알리겠다며 개별 계약된 충전기마다 일일이 안내문을 발송했다. 이 때문에 A사에도 계약 건수와 같은 수의 안내문이 한꺼번에 배달되며 이른바 ‘안내문 폭탄’이 쏟아진 것이다. A사는 충전기 4만여 기에서 발생하는 전기 요금은 한전의 통합 정산 서비스를 통해 한 번에 납부하고 있지만, 안내문 발송 때 그런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A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뿐 아니라 충전기 업체마다 이런 ‘폭탄’이 도착했다”며 “막대한 적자를 핑계 대며 전기 요금을 계속 인상하는 한전이 같은 내용의 우편물을 수천~수만 장씩 보내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우편물 하나당 제작·발송 비용을 500원으로만 계산해도 수천만 원 이상 비용을 들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업무를 인터넷, 모바일로 처리하는 지금, 이런 쓸데없는 안내문을 보내기 위해 연봉 수천만 원 직원들이 모여서 발송 작업을 했을 걸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고 했다. 한전 직원의 평균 연봉은 지난해 7900만원에 달했다. 평균 시간당 3만원이 넘는다.


한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요금 부과 방식이 10여 년 만에 처음 바뀌다 보니 규정에 따라 모든 전기 계약 사용자들에게 변경 사항을 자세히 안내하려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경영 상황이 어려워지면 ‘비용과의 전쟁’에 나서는 민간 기업과 대조적이라는 지적이다. 2022년 말 비상 경영 체제를 선포한 삼성은 프린터 용지를 포함한 각종 소모품 비용부터 50% 절감했다.

◇주소 변경에만 2개월 걸려

요금 인상과 함께 내부 노력이 요구되지만, 한전 내에서는 관성에 따른 방만 경영이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A사와 같이 안내문 폭탄을 받은 B사는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전기 요금 청구서 배송 주소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소 변경에만 2개월이 걸렸다. 전기차 충전기 계약 담당자와 주소 정보 담당자가 서로 달라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였다. 이번 안내문 폭탄도 일부가 전 주소나 엉뚱한 주소로 가는 바람에 항의 전화를 받는 일도 있었다.

지난 5월에는 전기 요금 납부 방식을 계좌 이체에서 카드 결제로 바꿔달라고 한전에 요청했지만,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이 회사 직원은 “수없이 공문을 보낸 끝에 ‘이달 중으로는 처리될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을 뿐”이라며 “통신 요금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안에는 바꿀 수 있는데, 전기 요금은 반년 넘게 걸리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사 관계자는 “한전에 연락하면 본사와 지사, 지점이 서로 자기 일이 아니라며 업무를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전직 고위 관료는 “‘안내문 폭탄’은 분명히 발송 과정에서 문제를 확인했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그대로 진행했다는 건 경영난에도 별다른 고민이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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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