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건설업 공사장 1만9197곳 ‘임금 4363억’ 떼먹었다

▲ 건설 현장 임금체불이 지속되는 가운데, 건설업계의 고질병인 ‘불법하도급’이 체불노동자의 고통을 심화시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10월부터 경기도 광명 기아 전기차 생산공장 개보수 공사를 한 노동자 99명은 같은 해 12월부터 지난 1월까지 임금 3억8천여만원을 못 받았다. 공장 앞 집회 등 노동자들이 이리저리 뛴 끝에 일부는 청산됐지만, 2억5천여만원은 여전히 체불 상태다. 해당 건설공사는 기아가 A사에 발주했고, A사는 B사에 도급해 노동자들도 B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일했다. 그러나 B사는 C사에, C사는 다시 개인사업자에게 도급했다. A사 기준으로 ‘재재하도급’이 이뤄진 것이다. 건설산업기본법은 종합건설업체에서 전문건설업체로의 한 단계 도급만 허용해, 이런 다단계 도급은 ‘불법’이다.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불법하도급 사실을 몰랐다. 체불 노동자 이진수(가명)씨는 “노동부에 진정을 넣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업체들이 튀어나와 황당했다”며 “기아차에서 A사에 발주한 공사 금액만 수백억원인데 2억5천만원이 해결 안 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지난 3월 고용노동부 안양지청에 진정했지만, 사건은 울산을 거쳐 포항지청에 가 있다. 조사 때마다 새로운 사업주가 나타나, 해당 사업주의 소재지로 관할 노동청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포항지청 관계자는 “공사대금의 적정성 문제로 사업주 간 다툼이 있어 체불 청산과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건설업이 주도하는 ‘사상 최대’ 임금체불

건설업 임금체불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증가 추세다. 특히 건설업의 고질병인 ‘불법하도급’ 구조는 체불 노동자의 고통을 심화시킨다.


2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동부에서 제출받은 업종별 임금체불 현황 자료를 보면, 지난해 건설업 임금체불액은 4363억원으로 2022년(2925억원)보다 49.2% 급증했다.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지난해 전체 임금체불액 1조7845억원 가운데 건설업 체불액은 전체의 24.4%로 사실상 건설업이 임금체불 증가세를 이끌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도 건설업 체불액은 2478억원으로 전체 체불액의 23.7%를 차지했다.

건설업 임금체불의 증가는 건설 경기 침체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건설산업지식정보 시스템을 보면, 지난 1~9월 건설업 부도업체는 종합건설업 8곳, 전문건설업 15곳 등 23곳으로 지난해 전체 21곳을 넘겼다. 건설업체의 경영난은 불법하도급 유인을 늘린다. 전문건설업체는 종합건설업체에서 도급받은 공사를 쪼개 여러 업체에 재하도급하고, 해당 업체들은 다시 ‘오야지’, ‘팀장’이라 불리는 개인사업자에게 재하도급한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관계자는 “원래부터 건설업계에 불법하도급은 만연해 있지만, 건설사들이 인상된 자재비 등을 감당하기 위해 인건비를 줄일 목적으로 불법하도급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책임 떠넘기고…조사도 불출석

불법하도급 구조에서 임금이 체불되면 제일 끝단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고통이 전가된다. 하도급 구조에서는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를 조사하는 근로감독관도 골치가 아프다. 수도권의 한 근로감독관은 “오야지들은 자금력이 없어 체불 청산이 어렵고, 이들은 노동법은 물론 본인들이 사용자라는 인식 또한 부족하다”며 “사업 거점도 일정하지 않아 출석 요구에도 불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노동부는 임금체불 조사 중에 사업주 소재 파악 불가 등으로 조사가 불가능한 경우 ‘기소중지’로 분류하는데, 지난해 건설업 체불사건(접수건수 기준) 가운데 기소중지 비율은 4.1%로 전체 평균 2.2%보다 높다. 조사 단계에서 임금이 일부라도 지급돼 노동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혀 ‘지도해결’되는 비율도 건설업은 73.2%로 전체 평균(77.7%)보다 낮았다.


이 같은 불법하도급 구조에서의 체불 피해 최소화를 위해,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은 근로감독관이 체불 조사 과정에서 불법하도급이 의심되는 경우 관련 사실을 건설업체 등록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 임금체불이 확인된 건설업체 1만9197곳의 상당수가 ‘불법하도급’으로 추정됨에도, 지자체에 통보된 사업장은 131곳에 그친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노동자와 사업주 사이 합의가 이뤄진 경우는 제외하고, 사건을 검찰로 송치해야만 통보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 ‘노사법치’ 달성하려면

불법하도급과 임금체불의 증가는 정부의 ‘건폭몰이’와도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법치를 내세워 노조를 불법집단으로 몰아세운 탓에 노조의 사업주 불법행위 견제 기능마저도 줄었기 때문이다. 김세정 노무사(노무법인 돌꽃)는 “건설노조는 전문건설업체와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해 불법하도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단체협약 등을 통해 임금지급기일을 정해 체불 발생을 막아왔다”며 “노동조합이 건설 현장 ‘준법’을 위한 노력을 해왔지만 건폭몰이로 인해 사업주의 불법행위가 늘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건설 현장 불법 근절, 임금 인상을 요구했던 노조에 대한 건폭몰이는 건설사들의 인건비 절약을 위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정부와 발주처가 건설업체의 불법행위에 눈감으면서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고 했다.

박해철 의원은 “정부가 건설 현장의 ‘노사법치주의’를 이룩할 생각이 있다면,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불법하도급부터 뿌리뽑아야 한다”며 “사업주 불법에 대한 엄한 처벌이 있어야, 정부가 건설사의 이익을 위해 ‘건폭몰이’를 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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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