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블랙리스트’ 악용 소지…이유 모른 채 일용직 재취업 거부당해

“문서 활용됐다면 사실상의 해고”
일용·계약직으로 근기법 규제 회피
1년 계약 뒤에도 이유없이 갱신 거절도

▲ 홍익표 공공운수노조 쿠팡물류센터지회 고양부문회장(오른쪽)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쿠팡의 노동조합 활동 방해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17년 9월 인천의 한 쿠팡 물류센터에서 한달가량 일용직으로 일한 최아무개(56)씨는 업무 내용이 바뀐 직후 관리자의 지적에 “어떻게 바로 일을 잘할 수 있냐”고 항의한 뒤 귀가 조처됐다. 바로 이튿날부턴 일용직 지원을 해도 채용되지 않았다. 최씨는 뒤늦게 쿠팡풀필먼트서비스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사실을 알게 됐다. 리스트엔 최씨가 ‘폭언, 욕설 및 모욕’을 했다고 적혔다. 최씨는 “당시 폭언을 한 일은 없다”며 “생계를 위해 일단 다른 물류센터를 알아봐야 했다”고 말했다. 일용직이던 최씨에겐 쿠팡 쪽의 재취업 거부가 사실상 일터에서의 ‘해고’였던 셈이다.


쿠팡 물류센터를 총괄하는 쿠팡풀필먼트서비스가 취업 제한을 목적으로 일용·계약직 노동자 등 1만6450명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이런 식의 노무관리가 사실이라면 입직과 이직이 반복되는 플랫폼 산업에서 회사 쪽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단 분석이 나온다. 온라인에서 수시로 일용직을 채용하고 재취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근로기준법의 해고 제한 규정이나 징계 절차 등을 회피할 수 있는 탓이다. 쿠팡풀필먼트는 일용·계약직 등 기간제 노동자만 2만6325명(2023년 고용노동부 고용형태공시)에 이른다.

쿠팡풀필먼트의 경우 채용 절차를 단순화해 사람들을 일단 끌어모아 ‘인력 풀’을 확보한다. 일용직은 입사 신청만 하면 곧바로 일할 수 있다. 별도의 면접 절차도 없다. 입사 신청이 어렵지도 않다. 쿠팡 자체 애플리케이션 ‘쿠펀치’ 혹은 구직 중개 플랫폼에서 지원하는데, 지원서엔 이름, 휴대전화번호,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 실거주지 등만 기재하면 된다.

회사로선 입사 문턱을 낮춰 인력 풀을 확보한 만큼 사실상의 해고도 간편하다. 최씨처럼 일용직인 경우 ‘티오(정원)가 찼다’는 이유 등을 들어 재취업을 거부할 수 있다. 12개월 계약직 노동자의 경우엔 별다른 사유 없이 계약이 끝나기도 한다. 대구의 한 물류센터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윤아무개씨는 “1년 만에 계약 종료를 당했지만, 그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고 했다. 윤씨도 2022년 10월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노동자를 해고하면 부당해고로 본다. 하지만 쿠팡풀필먼트는 현장 노동자 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하면서 이런 규정을 피해 갈 수 있다. 일용직 등의 재취업 거부를 ‘사유를 알려주지 않는 해고’와 비슷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노동법)는 “계약 거절이나 재취업 제한을 하는 식으로 (블랙리스트) 문서가 활용됐다면, 사실상의 해고라고 법리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재취업 제한 사유 등이 공식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 재취업 거부에 자의적 평가가 끼어들 여지가 많은 점 또한 문제로 지적된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하급 관리자의 자의적 판단에 기대서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는 것”이라며 “현장 노동자 사이에도 암암리에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알려지다 보니, 노동 강도나 작업장 환경에 대한 정당한 권리도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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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