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조선업계의 골칫덩이였던 드릴십(시추선) 재고가 최근 속속 팔리면서 조선사들의 어깨가 가벼워졌다. 유가가 높아지고 에너지 대란 위기가 찾아오면서 시추선사들은 심해 유전 탐사 개발을 재개하기 위해 드릴십 재고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1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최근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드릴십 매각에 연이어 성공하면서 국내 조선사가 보유한 드릴십 재고가 3기로 줄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국내 조선업계 드릴십 재고가 10기였음을 감안했을 때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가격이 일반 선박의 수배에 달하는 드릴십은 조선시황이 악화된 2008년 이후 국내 조선사들의 구원투수였다. 한때는 1기 당 가격이 6억 달러를 넘기도 했지만, 저유가 여파로 2014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신규 발주가 전무했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이 수주했던 드릴십은 유가 하락으로 계약이 파기되면서 '악성 재고'로 남게 됐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이 최근 몇 년 간 대규모 적자를 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도 드릴십이 악성재고로 남아서다. 드릴십 재고자산 가치가 떨어지고 1기당 매년 100억원 이상의 유지보수 비용이 반영되면서 재무구조가 악화됐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11월 드릴십 1기를 매각한 데 이어 지난달에도 드릴십 1기를 2억 달러(약 2673억원)에 판매하는 계약에 합의했다. 나머지 3기 중 2기는 인도할 선사가 정해졌고 대금도 70% 납입된 상태다. 내년에 예정대로 인도가 이뤄지면, 대우조선의 드릴십 재고는 1기로 줄어든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5일 보유하고 있던 드릴십 재고 1기를 매각했다. 앞서 지난 5월엔 드릴십 재고 4기의 소유권을 큐리어스파트너스가 결성한 사모펀드(PEF)에 1조400억원에 넘겼다. 큐리어스파트너스는 드릴십 1기에 대해 유럽 지역 시추선사와 조건부 매매계약을 체결했으며 최근 1기를 추가로 매각했다. 삼성중공업은 큐리어스파트너스에 5900억원을 출자했는데 나머지 2기까지 팔리면 투자금을 충분히 회수할 수 있을 전망이다. 남은 드릴십도 여러 시추선사와 협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2013년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드릴십이 팔렸지만, 업계에선 재무 부담을 덜었다며 안도하고 있다. 드릴십 매각은 손익 변동성을 크게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현금 유동성 개선 효과도 가져온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과거 드릴십 가격이 5억 달러였다고 2억 달러에 팔린 것이 큰 손해라고 보기 힘들다"며 "계약이 취소되면서 선수금 받은 것도 있고 재고가 팔려야 유지보수비용 등 부수적인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유가가 지속되는 등 매각 여건이 개선되면서 나머지 드릴십 처분도 문제없을 전망이다. 심해 유전 채굴은 유가가 배럴당 60달러가 넘을 때 경제성 있는데 현재 국제유가는 배럴당 70달러대를 기록 중이다. 유전 개발업체로선 가격이 저렴하고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한국 조선사의 드릴십 재고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드릴십 매각을 조선업황 회복의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영수 삼성증권 연구원은 "환경규제 강화로 신규유전 개발에 대한 투자가 감소하면서 드릴십은 해양구조물 중에서도 가장 수요가 부진했던 분야"라며 "그럼에도 드릴십 매각이 성사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해양 구조물 시장의 영업환경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내년 국내 조선사들의 해양구조물수주 재개를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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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