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제안' 걷어찬 北.. 尹 '담대한 구상' 휴지조각 위기

이산가족상봉 회담 제안 하루 만에
"비핵화는 없다" 핵정책 법제화 발표
전문가 "北에 도발자제 명분줘야"

▲ 평양 만수대기슭에서 지난 8일 열린 북한 정권수립일(9·9절) 74주년 경축 행사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한 여성(붉은 원)이 수행하고 있다. 현송월이 도맡아 해오던 김 위원장 의전을 올해 초부터 새로운 인물들에게 분담시키는 모습이다. 뉴시스

정부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회담을 제안한 지 하루 만에 북한이 ‘핵정책 법제화’를 발표하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북한이 비핵화에 따른 경제적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 등 남측의 제안을 모두 걷어차면서 윤석열정부의 대북정책인 ‘담대한 구상’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9일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있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전하며 핵무력 정책을 법에 명시한 사실을 보도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남북 회담을 제안하며 손을 내민 날(8일) 북한은 남측을 향해 핵 선제공격을 감행할 조건을 만든 셈이다. 북한은 김 위원장에 대한 참수작전 임박 징후 등과 같은 ‘자의적 위협 판단’을 핵무기 사용 가능 조건으로 법령에 명시함으로써 언제든 남측을 겨냥할 수 있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연설에서 “만약 우리의 핵 정책이 바뀌자면 세상이 변해야 하고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환경이 변해야 한다”며 “절대로 먼저 핵포기란, 비핵화란 없다”고 강조했다. 한·미의 대북 억제력 강화 조치의 수정 없이는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 논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두고 북한이 자신들의 핵무력 강화를 정당화하고, 궁극적으로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목적이란 관측이 제기됐다. 핵정책 법제화를 계기로 한반도를 둘러싼 핵 위기 우려도 한층 고조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이산가족 회담 제안은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로선 핵 협상보다 문턱이 낮은 인도적 지원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것이지만 핵무력 강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북한이 이산가족 논의를 선순위에 놓을 리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북한 내 이동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 북한 사회에서 소위 ‘적대계층’으로 여겨지는 북측 이산가족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 등의 물리적 한계도 지적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에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이산가족을 ‘희망고문’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부가 비핵화 협상의 문턱을 낮추는 등 대북정책 자체를 유연하게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비핵화 원칙은 유지하되 핵 군축, 군비 통제, 확장억제력 일부 제한 등까지 적극 포함시킴으로써 북한이 담대한 구상을 수용할 수 있도록 협상 테이블을 넓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북한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해온 체제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공개적으로 거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7차 핵실험을 포함한 고강도 도발을 강행하지 않게끔 명분을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한처럼 법제화를 통해 자신들의 핵정책을 자세히 공개한 나라는 없다. 핵전략은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이번 법제화는 자신들을 말려 달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북한이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만큼 당분간은 정부가 상황 관리에 힘쓸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핵무기 선제사용 의도를 밝힌 북한과 자칫 무력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이런 위협을 줄이는 데 정책의 주안점을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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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