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박정덕 선생 향년 92세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조선 처녀들을 위안부로 많이 끌고 갔다. 그래서 선생의 부친은 딸의 혼사를 서둘렀다. 17살에 부친이 정해준 사람과 결혼했다. 당시 활발한 좌익 운동가였던 남편은 결혼식 날을 빼고는 경찰을 피해 입산해 생활했다. 선생은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좌익운동을 하던 시숙과 오빠까지 산으로 피신했다. 그 이후부터 선생은 ‘빨치산의 아내’라는 이유로 경찰의 모진 고문을 당해야했다.
선생은 그날부터 고향을 떠나 숨어 지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서야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남편과 재회했다. 남편은 석곡면당 위원장으로 선생은 여맹 선전부에서 활동하다 공세를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별명이 ‘구르마’였을 정도로 이곳저곳 다니며 산을 잘 탔다. 1951년 봄, 선생은 산에서 아이를 가졌다가 사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1951년 겨울, 빨치산에 대한 대공세가 시작되자 고통은 몇 곱으로 다가왔다.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며 공세를 피해 다녀야했다. 1952년 2월 9일 산속으로 피해 달아나던 선생은 100m가 넘는 빙판으로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동지들에 의해 석굴로 옮겨져 혼자 숨어 있었다. 두 끼 식량이 전부였다. 치료를 못한 오른쪽 다리가 3일 후부터 썩어 들어갔다. 며칠 후에 동지들이 식량을 짊어지고 다시 찾아왔다.
그때 사선을 뚫고 찾아온 동지들의 뜨거운 사랑을 심장 깊이 느끼며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석굴에 혼자 고립되어 숨어 지냈다. 치료를 못한 다리가 썩어 들어갔다. 더 이상 석굴에 갇혀 지낼 수 없었다. 50일째 되는 날 굴을 빠져 나와 냇가 옆 빈 집에 몸을 숨겼다. 살이 썩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길 가던 농부에게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선생은 체포된 이후에 썩은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광주형무소에서 7년형을 살고 1959년에 출소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29살 이었다. 지리산에서 사살된 남편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빨치산 출신이자 불구가 된 선생을 반기는 곳은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에 10살 연상의 두 번째 남편을 만났다. 남편과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 20여년을 함께 산 남편은 아버지, 형님 등과 울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포상을 받았고 1983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빈소는 경기 고양시 일산장례식장 5호실에 마련됐다. 4일 오전 10시 발인해 남편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에 안장할 예정이다. 문의:(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회장 김혜순) 02) 874-4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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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