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서도 러시아산 원유 기피 현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지정학적 긴장이 빠르게 고조되고 있다. 이에 주요 산유국인 러시아에서의 원유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며 유가는 급등했다.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간) 유가는 7% 이상 올라 2014년 이후 고점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러시아에 대해 에너지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의견 역시 지지를 얻고 있어 유가는 강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앞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 배제를 포함해 다양한 제재안을 내놨다. 그럼에도 이미 수십년래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세)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 러시아 원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에 대한 수입 제재만은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주위에 러시아군의 행렬이 길어지며 민간인의 피해마저 커지자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 역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얻고 있다.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미국 의회에서 높아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제재해야 한다는 주제가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의 흔치 않은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상원 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를 주재하는 민주당 출신의 조 맨친 상원의원은 1일 백악관이 "러시아가 우리의 동맹국들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원유 수입을 제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밝혔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에너지를 무기화했으며,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역시 "러시아산 원유 배럴마다 피가 묻어 있다"라며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는 옥사나 마르카로바 미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 역시 러시아의 원유·천연가스 사업에 대한 제재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미국 민주당 출신의 에드 마키 상원의원은 같은 날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막는 법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키 상원의원은 "미국의 화석 연료 기업들은 푸틴 대통령의 비열한 우크라이나 침공에 돈을 대고 있다"라며 "러시아산 원유 사업과 푸틴 대통령 행정부 하의 부정부패 및 인권 침해는 분리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 역시 러시아에 원유 대금으로 더러운 돈을 지불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이 러시아산 원유에 의존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지만 여전히 러시아를 포함해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WSJ에 따르면 지난 2021년 한 해 간 미국의 전체 원유 및 정유제품 수입량 중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캐나다와 멕시코에 이어 3위로 약 7.9% 수준이다. 앤디 리포우 리포우원유협회LLC 회장은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를 인용해 미국은 지난해 일일 약 67만2000배럴 가량의 원유와 정유제품을 러시아에서 수입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중반 러시아 원유 수입량이 약 10년래 최고 수준까지 치솟은 후 최근 증가세를 보여 왔지만 러시아는 미국의 원유 공급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미국 내에서 러시아산 에너지에도 제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시장에서도 러시아 원유 기피 현상마저 나오고 있다. 미국 뉴욕 내 항구의 한 수입업자는 "사람들이 러시아산 원유에 손대려고 하지 않는다"라며 "침공 전에 수입한 러시아 원유가 일부 유통되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밝혔다. 그는 "아무도 러시아 제품을 사들이는 것으로 보이고 싶어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 돈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러시아산 원유를 매입한다고 하더라도 서방의 금융 제재가 문제가 된다. 앞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기 위해 러시아를 SWIFT 결제망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각국의 금융기관들은 SWIFT 결제망을 통해 국경을 넘는 결제 과정을 거친다. 제재가 어떻게 이뤄질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들은 러시아 관련 거래를 미루고 있다. 사라 헌트 HFW 파트너 변호사는 "최근의 제재는 러시아와의 무역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며 "러시아에 대한 제재는 세계 무역에 놀라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WSJ에 말했다.
러시아산 원유의 공급이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원유 가격은 급등하고 있다. 지난달 골드만삭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으로 세계 시장에서 원유가 급작스럽게 감소할 경우 5월까지 유가는 25% 이상 상승해 배럴당 125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골드만삭스 분석가들은 러시아 에너지 공급업체에 대한 제재,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사업 중단, 미국과 이란 간 핵 합의 결렬 등이 모두 원유 공급을 억제할 수 있는 요인이라고 밝혔다.
컨설팅업체 리스타드에너지 역시 전쟁으로 인해 공급이 위태로워지면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배럴당 130달러까지 달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간이 걸릴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제런드 리스타드 리스타드에너지 최고경영자(CEO)는 "유럽과 다른 국가들에서 유가가 더 오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미국 투자전문매체 시킹알파는 모건스탠리가 1일 2분기 브렌트유 유가 전망을 기존의 100달러에서 110달러로 올려 잡았다고 밝혔다. 모건스탠리는 최근의 지정학적 위험으로 인해 전망을 상향 조정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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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