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중국 前주석 사망] 시진핑 견제할 유일한 거물

▲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생전 모습./로이터 연합뉴스
장쩌민(96) 중국 전 국가주석이 30일 별세했다. 중국 국영 CCTV는 이날 오후 “장 전 주석이 30일 12시 13분 상하이에서 별세했다”면서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이 사망 원인”이라고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왕예핑(王冶坪) 여사와 중국과학원 상하이분원장을 지낸 몐캉(江綿康), 상하이발전정보센터 주임을 지낸 몐헝(江綿恒) 등 두 아들이 있다.

이날 타계한 장 전 주석은 개혁·개방의 설계사였던 덩샤오핑을 이어 집권해 중국을 세계 2위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장 전 주석은 1926년 중국 장쑤성 양저우에서 부유한 전기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한학을 비롯한 엘리트 정규 교육을 받아 시문과 음악에 능했다. 피아노와 기타, 중국 전통 현악기인 얼후 등을 연주할 줄 알았다. 1947년 상하이자오퉁(上海交通)대 전기과를 졸업하고 30년 넘게 자동차 공장, 전기연구소 등에서 근무했다. 50대 중반이 돼서야 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 전자공업부 부장(장관)을 맡았다. 상하이시 당서기를 마친 후 모교인 상하이자오퉁대 교수로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평범한 기술관료로 평생을 보낸 장 전 주석을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였다.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를 맡고 있던 그는 시위 사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메가폰을 들고 거리로 나가 학생들과 직접 대화함으로써 시위가 극단으로 이르는 것을 막았다. 유혈 진압으로 이어진 수도 베이징과 뚜렷이 비교됐다. 장 전 주석은 그해 6월 덩샤오핑에 의해 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됐다. 이어서 같은 해 12월 군권(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받았고, 덩샤오핑이 은퇴한 직후인 1993년 중국 국가주석에 오르며 당, 정, 군을 장악했다.

장 전 주석은 총서기에 오르기 전 덩샤오핑과 면담에서 청대 관료인 린저쉬의 시를 인용하며 “국익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죽는 것과 같은데, 일신의 행·불행 때문에 국가를 위하는 일에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1989년 중국공산당 13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연설에서는 “나는 총서기로 일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장 전 주석의 장점은 정치적 균형 감각과 유연성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쪽이었지만, 대중의 정서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무슨 일이든 “좋다(好)”고 해 하오하오 선생(好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자당(혁명 원로나 고위 지도자 자제)으로 분류되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과 협력해 당과 정부, 군에 방대한 상하이방(上海幇) 인맥을 구축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쌓았다.


가장 큰 업적은 덩샤오핑 개혁·개방 노선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공산당이 노동자·농민 뿐만 아니라 자산가·지식인의 이익까지 대변해야한다는 ‘3개 대표이론’으로 시장경제 도입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경제 전문가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발탁해 계획경제 체제 당시의 금융, 국영기업 체제에 대수술도 단행했다. 대량 해고를 통해 비대한 국유기업, 군대 조직을 개혁했다. 장 전 주석은 미·중이 출동할 때 국익을 위한 협력을 택하고, 미국을 설득해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 성장과 당·정부와 기업인의 유착으로 부정 부패도 문제가 됐다. 2006년에는 장 전 주석의 측근으로 분류되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가 사회보장기금 대출 비리 사건 등으로 낙마해 18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로 급파돼 사건 수습을 맡으며 중앙 정치무대에 부상인 인물이 시진핑(習近平) 현 중국 국가주석이다.

장 전 주석은 재임 중 정상 외교 현장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이곤 했다. 미국 방문 때는 즉석에서 기타 연주를 했고, 프랑스 방문 때는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 영부인과 춤을 췄다. 특히 영어에 능통해 공식 석상에서 자주 영어로 연설하곤 했다. 2000년 10월 베이징 중난하이 집무실에서 노골적인 질문을 퍼붓는 홍콩 기자에게 “너무 어리고, 너무 단순하다(too young too simple)”고 꾸짖은 장면은 유명하다. 1995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을 찾았을 때는 궁금한 내용을 직접 영어로 질문했다.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깊어 1995년11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장 전 주석이 별세하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권력은 한층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 주석을 차기 권좌에 올린 것은 장 전 주석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上海幇)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이 때문에 시진핑 주석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거물로 평가돼왔다. 2018년 중국 공산당이 국가주석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해 시 주석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자 장 전 주석이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외신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저작권자 ⓒ 매일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차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