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외손자
우익 상징이자 전후 세대 첫 총리
당·내각 요직 모두 거치며 두각
8일 거리 유세 도중 총격을 받아 숨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통산 8년8개월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로 재임하며 일본 정치의 보수화를 이끌었다. 향년 67.
1954년 도쿄에서 태어난 아베 전 총리는 외무상을 지냈던 아버지 아베 신타로(1942~1991)의 비서로 1982년 정계에 입문했다. 1991년 아버지가 별세하고 2년 뒤인 1993년 지역구를 물려받아 중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일본의 ‘세습 정치인’ 중 하나였던 아베 전 총리는 당시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밝히면서 우익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정치적으로 급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02년 9월 이뤄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1차 방북이었다. 당시 관방 부장관으로 동행한 아베 전 총리는 이후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강경 대응을 주문하며 ‘신뢰할 수 있는 우익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주가가 오른 그를 2003년 자민당 간사장, 2005년에는 내각의 2인자로 불리는 관방장관으로 임명했다. 당과 내각의 요직을 모두 거친 그는 2006년 전후 최연소인 52살로 총리에 올랐다. 첫 전후 세대 총리이기도 했다.
첫 집권기는 1년으로 끝났지만
‘아베노믹스’로 장기 집권 성공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장본인
그는 1차 집권 시기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일본이 2차 대전에 패전하면서 연합국 점령 아래서 군대 보유 및 전쟁 금지를 규정한 현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었다고 보고, 개헌을 통해 타파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이는 외할아버지이자 에이(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였다. 기시는 전력 보유 금지를 규정한 일본의 ‘평화헌법’을 미국이 강요한 것으로 보고 헌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아베 전 총리도 그 뜻을 이어받아 개헌을 “필생의 과업”으로 꼽으며 마지막까지 뜻을 꺾지 않았다.
아베 전 총리의 1차 집권은 1년 단명에 그쳤다. 교육기본법 개정 같은 보수적이며 이념적인 정책,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에 대한 공격에 치중했다. 여기에 각료들의 망언과 정치 스캔들이 겹쳤다. 미국 하원은 이에 맞서 2007년 7월 말 위안부 결의안을 내놓았고, 같은 시기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도 대패했다. 결국,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 악화까지 겹쳐 2007년 9월12일 사임을 발표했다. 이 일로 가볍게 정권을 내던졌다는 비난을 받았다.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아베 전 총리는 절치부심했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중국의 위협에 맞서는 ‘강한 외교’와 ‘아베노믹스’와 같은 실용적 정책 등을 내세워 2012년 12월 두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보수적 이념 지향성은 그대로였지만 정권 운영에 완급을 조절했다.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집권 초부터 금융완화를 뼈대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추진했다. 일본인들의 실생활과 직결되는 경제정책에 집중한 것이다.
이런 노련한 정국 운영이 효과를 발휘해 2차 정권은 7년8개월에 이르는 장기 집권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2014년 7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허용하는 헌법의 해석 변경, 2015년 9월 이를 구체화하는 안보법제 제·개정을 이뤄냈다. 또 2016년부터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라는 구상을 내세웠다. 이 구상은 현재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으로 채택돼 ‘쿼드’ 결성으로 구체화됐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상대적 쇠퇴라는 공동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 동맹을 이전보다 활동 범위와 역할이 확대된 ‘글로벌 동맹’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집권 기간 내내 목표로 삼았던 것은 개헌이었다. 2017년 5월에는 교전권 포기를 명기한 9조는 그대로 놔두고 자위대 관련 기술을 추가하는 개헌을 하겠다며 2020년이라는 목표 시점까지 언급했다. 2차 정권 출범 뒤 모든 중의원·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기세로 봤을 때 그가 “필생의 과업”을 이뤄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야당의 완강한 반대와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회의적 반응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집권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의 피로도도 증가했다. 그와 가깝거나 가까워 보이는 인물들이 운영하는 사학법인이 특혜를 받았다는 ‘모리토모·가케학원 스캔들’, 국가 예산을 지지자들을 접대하는 데 사용했다는 ‘벚꽃을 보는 모임 스캔들’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마지막 기폭제가 됐다. 도쿄올림픽 개최는 한해 연기해야 했고 2020년 봄 내각 지지율은 위험 수위로 불리는 20%대까지 떨어졌다. 그는 그해 8월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이유로 사의를 밝힌 뒤, 9월 총리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벚꽃 스캔들·코로나로 정치 타격
지병 이유로 총리직 사퇴했지만
막후에서도 정계에 영향력 행사
하지만 퇴임 뒤에도 일본 정계를 여전히 좌지우지하는 인물이었다. 뒤를 이어 총리에 오른 스가 요시히데는 “아베 총리가 추진해온 정책을 계승해나가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말하며 총리직에 올랐다. 2021년 10월 집권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베 전 총리는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세이와정책연구회)의 수장 자리를 유지했다.
아베 전 총리의 죽음을 대하는 한국인의 평가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식민지배에 대해 더 이상 사죄와 반성을 할 수 없다는 ‘역사 수정주의자’였고, 또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려는 ‘우익’이었다. 2015년 12월엔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이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이 합의를 통해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2016년 10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나왔지만,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단칼에 거부했다. 그가 원한 것은 한·일이 역사를 잊고, 안보협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의 유산은 앞으로 오랫동안 일본 정치를 떠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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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