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문도 없는 희한한 북·러 정상회담…결국 비즈니스 관계였나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 연회 등 일정을 진행한 뒤 다음 방문지를 향해 떠났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4일 보도했다. 뉴스1
13일 이뤄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정상회담이 남긴 뒷맛이 묘하다. 국제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의미로든 ‘세기의 정상회담’이었지만, 통상적이지 않은 이후 상황들 때문이다. 애초에 ‘비즈니스 관계’인 김정은과 푸틴 사이의 한계를 보여주는 징후일 수 있다.

결과물도 없는 ‘비정상적’ 정상회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정상회담 뒤 공동선언문을 포함한 어떤 형태의 문서에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 푸틴이 김정은을 맞이해 연 연회도 다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정상회담에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이 따르는 게 정상이다. 공동성명이나 공동선언, 언론발표 혹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정상의 발언으로라도 회담 결과를 공표하는 게 통상적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2000년 푸틴이 방북해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2001년에는 김정일이 답방 형식으로 방러해 ‘모스크바 선언’에 합의한 것과는 비교되는 상황이다. 2018년 3월부터 2019년 1월까지 김정은이 네 차례 방중했을 때는 합의문 등은 나오지 않았지만 양국 매체가 김정은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을 소상히 방대한 분량으로 전했다. 또 상호방문, 특사교환 등 구체적 성과도 양 측이 공통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더해 시진핑은 방북 하루 전인 2019년 6월 19일 노동신문을 통해 내놓은 ‘중조친선을 계승해 시대의 새로운 장을 아로새기자’라는 제목의 특별기고문에서 ‘전략적 의사소통과 교류 강화’, ‘국가관리 경험 교류’, ‘북한의 합리적인 관심사 해결지지’ 등도 언급했다.


하지만 크렘린궁은 두 정상이 헤어지기도 전에 이런 결과물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에 따라 회담 내용은 크렘린 측의 언론 문답, 다음날인 14일 나온 북한 매체의 보도 등으로 전해진 게 전부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는 추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는 김정은과 푸틴이 논의한 내용이 국제규범에 어긋나는 범범행위였기 때문일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위성 개발 지원,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 공격용 탄약 지원 등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 직면할 합의를 ‘자백’하는 게 될 수 있어서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한 전직 외교관은 “정상회담 뒤 공동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때는 중요 사안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거나, 둘 중 어느 한쪽이 결과물의 문안에 책임지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있다”며 “크렘린이 ‘문서 서명’을 언급한 걸 보면 최고위급에서 서명을 통해 합의를 남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한 것일 수 있어 보인다”고 전했다.

김정은의 푸틴 방북 초청을 두고 오해할 여지가 있는 상황도 있었다.북한 조선중앙통신 등은 연회가 끝난 뒤 김정은이 푸틴의 방북을 초청했고, 푸틴은 “초청을 쾌히 수락하면서 러조(러북) 친선의 역사와 전통을 변함 없이 이어갈 의지를 다시금 표명했다”고 14일 보도했다.


하지만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3일 회담과 연회가 끝난 직후 기자들에게 푸틴 대통령의 북한 답방 계획은 현재 없다고 밝혔다. 당시는 김정은의 초청 사실이 알려지기도 전인데, 선을 그은 듯한 모양새였다.

크렘린궁은 북한의 보도가 나오고 반나절 뒤인 14일 늦은 오후에야 “일대일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에게 북한에 방문할 것을 초청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초대를 감사히 수락했다”며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김정은 ‘현금 대 어음’ 거래했나

이를 두고 애초에 서로 필요와 편의에 의해 의기투합한 김정은과 푸틴 간 관계의 본질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애초에 외교가에서는 푸틴이 탄약과 포탄을 받는 대가로 김정은이 원하는 위성과 핵 관련 기술을 넘겨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전망이 많았다. 외교 소식통은 “주고 받는 데 있어서 등가성이 성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비확산에 대해서는 원칙이 확고한 나라”라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많은 원칙을 깨고 있지만, 그래도 러시아는 핵 보유국으로서의 배타적 지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입장을 지켜왔다”고 설명했다.


실제 북한산 탄약과 러시아의 기술을 주고받는 거래는 현금을 주고 어음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당장 안드리 유소프 우크라이나 국방 정보국 대변인은 1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이미 러시아에 탄약을 공급하고 있으며, 북한과 러시아 간 협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미 CNN 보도)

푸틴이 필요한 탄약을 챙긴 뒤 김정은이 바라는 핵기술 이전은 지연하거나, 상황에 따라 갑자기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는 관측도 그래서 나온다. 1대1 회담에서 약속했더라도 서명한 합의문이 없으니 약속의 ‘증거’도 없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북·러의 거래는 냉전시기 이념이라는 공동의 가치에 기반을 두었던 것과 달리 철저히 상업적(mercantile)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어느 한쪽이라도 자신의 전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합의가 깨질 수 있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부도수표’를 막으려면 상호 신뢰가 핵심인데, 지금의 북·러 관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을’인 줄 알았던 푸틴의 ‘가스라이팅’?

이와 관련, 2019년엔 김정은이 북·미 간 ‘하노이 노 딜’ 뒤 고립무원 처지에서 러시아를 찾았지만,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다급한 푸틴이 ‘을’이 됐다는 해석 자체가 틀린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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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