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불이익 줄이려고 점수제로 바꿨는데…되레 ‘점수 폭락자’ 속출

불이익 줄이려고 등급제에서 전환…되레 점수 낮아져
저신용자 중심 대출 문턱 더 높아져…靑 국민청원 등장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 중인 정모씨(43)는 최근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작년까지 신용이 2등급이라 어렵지 않게 대출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거절’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확인 결과, 정모씨의 신용은 기존 등급제에서 점수제로 바뀌면서 무려 200점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사실상 은행권 저금리 대출은 ‘불가능’이 확정돼버린 셈이다.

연초부터 신용점수제가 도입되면서 이로 인한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과거 신용등급제에서 점수제로 전환되면서 점수가 크게 주저앉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 같은 피해는 주로 저신용자들에게 집중돼 있다. 이에 서민들은 울상이다. 점수제 도입으로 새해부터 이용이 가능할 거라 기대했던 은행 대출의 문턱은 오히려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당초 금융소비자들의 피해를 줄여주겠다던 도입목적은 이미 퇴색돼버린 지 오래다. 급기야 신용점수제는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불만까지 쏟아지고 있다.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신용점수제가 시행되면서 금융소비자 다수의 점수가 100~200점가량 떨어졌다. 기존 1등급이던 사람이 800점대로 떨어진 경우도 있다. 이는 대출을 받는 소비자 입장에선 치명적이다. 신용점수가 100점 단위로 크게 떨어지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업권의 영역이 바뀌게 된다.

예컨대 기존 등급제에서 은행 대출이 가능했다면 저축은행으로 가능범위가 밀리게 된다. 중하위권 차주의 경우, 대부업체까지도 내몰릴 수 있다. 대출 금리도 크게 높아진다. 상위 차주의 경우, 100점이 낮아지면 평균 2~3%포인트 내외의 금리부담이 늘어난다. 하위차주는 10%포인트 이상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는 기존 등급제로 환산해서 살펴보면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각 등급별 점수 구간은 △1등급 942~1000점 △2등급 891~941점 △3등급 832~890점 △4등급 768~831점 △5등급 698~767점 △6등급 630~697점 △7등급 530~629점 △8등급 454~529점 △9등급 335~453점 △10등급 0~334점 등이다. 만약 점수가 100점가량 떨어지면, 1등급 차주가 최대 3등급으로까지 밀릴 수 있는 구조다.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신용을 평가하는 통계모형 자체가 변형됐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이스평가정보의 경우, 점수제 전환 이후 항목별 비중을 △현재 연체 및 과거 채무 상환 이력(40.3%⟶30.6%) △대출 등 채무 부담 정보 (23.0%⟶26.4%) △신용거래 기간(10.9%⟶13.3%) △신용 거래 패턴 (25.8%⟶29,7%)으로 각각 조정했다.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신용 평가모형 자체가 변경되면서 일부 대상자들 사이에 큰 폭의 변동이 발생했다”며 “이로 인해 소비자들이 다소 혼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급기야 청와대 게시판에는 신용점수제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는 국민 청원도 등장했다. 저신용자 불이익을 줄여주겠다는 도입 목적과 달리, 오히려 대출 환경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만큼 기존 체제로의 복귀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현재까지 청원에 동의한 인원은 총 494명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이 겹쳐 올 들어 서민들의 설 곳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는 토로도 나온다. 가뜩이나 은행들이 연초부터 대출 기준을 한층 보수적으로 조이고 있는데, 점수까지 낮아지면 중등급자가 찾을 곳은 ‘2금융, 사금융 대출’ 외엔 별다른 대안이 없어진다.

금융권 관계자는 “통상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하위 차주의 체감도가 훨씬 크다”며 “신용점수제가 아직 시행 초기인 만큼,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은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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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