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과 국제 기름값이 동시에 오르면서 국내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원-달러 환율 상승의 효과는 수출을 하고 달러를 받는 대기업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많았으나, 최근엔 국외 공장 증설 투자 등 달러 빚도 급증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고유가 수혜 업종인 정유업계도 지정학적 불안에 따라 수요가 줄면 되레 실적이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는다. 대기업들이 저마다 복잡한 셈법에 빠져 있는 가운데 중견·중소기업의 대부분은 어려움이 커질 전망이다.
22일 각 사 사업보고서를 보면, 대기업들은 원-달러 환율 5∼10% 상승때 수백억∼수천억원의 순이익이 증가 또는 감소할 것이라고 공시했다. 현재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말(1288원)에 견줘 7.08% 오른 상태다.
수출 위주의 대기업은 일단 고환율이 유리하다고 봤다. 국외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원화로 환산한 실적도 커진다. 대표적인 곳이 현대자동차다. 현대차는 원-달러 환율이 지난해 말 기준(1289.40원)보다 5% 상승때 법인세비용차감전 순이익이 1023억3700만원 늘어날 것으로 추정했다.
똑같이 수출을 많이 하지만 이차전지 업체의 셈법은 더 복잡하다. 공장 증설 등 미국 투자가 크게 늘어서다. 달러 가치가 높아지면 외화부채를 갚을 때 부담이 커진다. 엘지(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말 기준보다 원-달러 환율이 10% 오르면 법인세차감전 순이익이 257억4600만원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말 기준 엘지엔솔의 달러화 외화부채는 4조2179억원으로 2년 전(3조4119억원) 대비 23.6% 증가했다. 최근 2년새 달러화 외화부채가 151.7% 급증한 에스케이(SK)온도 원-달러 환율 5% 상승때 법인세차감전 순이익이 220억7100만원 감소할 것으로 본다. 이와 반대로 국외 설비투자에 보수적으로 접근해온 삼성에스디아이(SDI)는 원-달러 환율 5% 상승때 법인세를 내고 난 ‘세후이익’이 11억7358만원 늘어난다고 공시했다. 다만 이 수치들은 재무제표상 추정치이므로 실제 손익은 다를 수 있다.
국제 기름값이 들썩이면서 관련 기업들도 복합방정식 앞에 놓여있다. 유가가 오를 때 가장 주목 받는 곳은 정유업계다. 유가가 상승해 석유제품 판매 가격이 올라가면 정제마진이 개선된다. 다만 정유업계는 중동발 불안에 경기가 꺾여 석유제품 수요가 감소하면, 원유는 비싼데 판매 가격을 올리지 못해 실적이 되레 악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또 유가가 오르면 미리 싸게 사둔 원유 재고로 평가 이익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추측에 대해서도 업체들은 선을 긋는다. 재고 가치는 ‘저가법’으로 이뤄진다. 가령 배럴당 70달러에 원유를 사서 탱크에 보관하면 시세가 90달러로 상승해도 재고 가치는 더 낮은 가격인 ‘70달러’로 평가한다.
항공업계는 환율과 기름값 오름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항공기 리스비, 유류비 등이 모두 달러로 거래된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말 기준 대비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하면 법인세차감전 순이익이 1793억5200만원 줄어들 것으로 바라봤다. 유가가 오르면 비용 부담도 커져 실적에 ‘빨간 불’이 켜진다.
중견·중소기업은 고환율·고유가에 직격탄을 그대로 맞을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과 달리 계산기를 두드릴 위기 분산 방안이 충분치 않아서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대기업은 환율·유가 변동의 보완책을 미리 마련할 수 있으나 중소기업은 그런 협상력이나 경영 전략을 갖기 힘들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진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