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고액 신용대출 규제에서 연초 일반 직장인 신용대출 규제로 확대
은행권 "당국 개입 지나쳐..저소득층 더 큰 피해" 우려도
정부가 시중 자금이 부동산·주식 등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해 연초부터 가계대출을 강하게 조이자 은행권에서는 '개입이 너무 지나치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래저래 자금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무턱대고 가계대출 증가율을 비현실적으로 낮추라고 하면 결국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고 신용이 낮은 서민층의 자금줄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당국 "가계대출 증가율 조정치 주겠다"…작년 절반 5% 수준 예상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의 요청에 따라 지난해 말 5대 시중은행 등은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 관리 목표를 제출했다.
은행에 따라 예년과 마찬가지로 약 5%를 써낸 곳도 있지만, 6∼8%를 써낸 곳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적으로 높은 증가율을 써낸 은행들은 코로나19 사태로 자금 수요가 급증하는 '특수 상황'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이어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5대 시중은행의 전체 가계대출은 2019년보다 9.73%(59조3천977억원)나 불었다.
하지만 지난 26일 금융감독원은 가계대출 동향 관련 회의에서 시중은행 가계 여신 담당 임원(부은행장급)들에게 "작년 말 은행들이 올해 연간·월간 가계대출 증가율 관리 목표를 제출했는데, 지나치다고 생각되면 조정치를 제시해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은행권은 결국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 목표가 5% 안팎 수준으로 일괄적으로 낮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결국 줄이는 건 신용대출…신한·우리 등 줄줄이 한도 축소·중단
이처럼 당국이 가계대출 증가율을 작년의 거의 절반 수준까지 낮출 것을 권고하면서 은행권의 고민과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결국 은행권은 작년 말에 이어 가계대출 중 신용대출을 집중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금융권 관계자는 "주택 거래가 작년 수준과 같다고 가정하면,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집값이 오른 비율만큼은 자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제어가 어려운 주택담보대출을 놔둔 채 가계대출 증가율을 5% 수준에서 맞추려면, 은행 입장에서는 신용대출을 조여야 한다. 소비자들로서는 올해 신용대출을 받기 매우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권의 '신용대출 조이기'는 이미 연초부터 심상치 않다.
앞서 15일 신한은행은 일반 직장인 신용대출 한도를 상품에 따라 1억5천만∼2억원에서 1억∼1억5천만원으로 5천만원이나 낮췄다.
우리은행도 지난 29일 마이너스통장 대출 상품의 한도를 기존 8천만원∼1억원에서 5천만원으로 대폭 줄였고, 인터넷전문은행 카카오뱅크도 22일 마이너스통장 대출을 비롯해 고신용 직장인 대상 신용대출 상품의 한도를 1억5천만원에서 1억원으로 5천만원 깎았다.
같은 날 수협은행은 아예 직장인 대상 'Sh더드림신용대출' 상품 중 마이너스통장 신규 대출을 중단했고, 케이뱅크는 28일 직장인 대상 마이너스통장 대출 금리를 0.1%포인트 올려 최저 금리를 연 3.0%로 상향 조정했다.
작년 10월 이후 은행권이 주로 고소득·전문직 신용대출 한도를 축소해왔는데, 당국의 압박 속에 신용대출 증가세를 충분히 억제하는 데 한계를 느끼자 이제 일반 직장인 등 서민 신용대출까지 옥죄는 것으로 해석된다.
은행권 "저소득·신용층을 고금리 제2금융·대부업으로 모는 셈"
금융당국의 강한 가계대출 규제에 대한 은행권의 인내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예년에도 금융당국이 연말연초에 은행 등 금융기관들로부터 대략적 대출 관리 계획을 받은 적은 있지만, 신용대출만 따로 떼어 '은행권 월 증가폭 2조원대'와 같이 월 단위로 관리한 것은 지난해 9월 '행정지도' 형태로 처음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도 "실무자 말로는 최근과 같이 당국이 가계대출 수치에 세세하게 간섭하고 조정 의견을 내는 것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전했다.
자칫 서민, 저소득층이 더 큰 피해를 보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이 자금을 꼭 필요한 가계에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면, 결국 저소득·신용 계층 실수요자는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권 등 이자가 더 비싼 금융기관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고, 서민들의 경제적 부담은 더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출 목표를 한정하는 것은 자금 순환을 인위적으로 막는 조치로, 자금의 동맥 경화를 일으켜 코로나19 이후 경기 회복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며 "자산 시장 버블, 유동성 확대 등을 걱정하는 당국의 입장도 있겠지만, 최근의 간섭은 지나친 수준"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도입을 예고한 '차주(돈 빌리는 개인)별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도 어떤 방식으로 운영될지 구체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같은 비율의 대출 규제라면 기본적으로 소득이 많은 사람보다는 저소득자가 한도 제한에 걸릴 가능성이 더 클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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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영 기자 다른기사보기